6.25환란 직전 오(吳)마티아 신부는 장래의 성당 신축을 위해 지금의 성당 부지 1,000여 평을 계약했다. 당시 지금의 성당부지는 호박밭이었다. 길음동 전신자들은 자발적으로 모금 활동을 전개하여 1963년 오늘의 성당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63년 본당의 교세는 5,875명. 당시 서울 교구 중에서 보기 드문 많은 신자의 성당이었다. 따라서 드넓은 부지에 성당 신축은 필연적으로 성사되어야만 했다.

1964년 땅주인에게 1,000여 평의 본당 부지 구입비로 지급한 금액은 45만원. 5,875명의 본당 신자 중에서 3,000원 이상 고액 현금자는 정그레고리오(1만원)을 비롯 모두 13명이었다.

가톨릭구제회로 부르던 NCWC에서는 6.25 전화로 참담한 지경에 놓여 있던 한국인들을 돕기 위해 천문학적인 금액의 구호물자를 전국 각 성당에 배급했다. 당시 신자수가 많은 미아동 본당(현 길음동본당) 등이 많은 혜택을 받았다. 성당에서는 구호식량(우유가루, 소맥분)을 극빈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때 구호식량만을 타먹기 위해 성당에 나오던 이들을 일컫던 ‘밀가루 신자’니 ‘나이롱 신자’니 하던 말이 크게 유행어가 되었다.

1957년 본당 교우들은 남녀노소 없이 노력봉사에 참여하여 시장길 밑에서 고개를 넘어 석재를 운반해 올렸다. 수돗물이 귀하던 시절이라 신자들은 성당에서 300m 아래에 있던 노문호 회장 집에서 물을 길어 나르는 노력봉사를 했다. 한여름 염천(炎天)의 힘든 노동이었지만, 하느님의 성전 신축사업에 참여한다는 영광으로 모두가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본당의 연령회인 ‘성모칠고회’는 1961년 6월 노기남 주교의 재가를 받아 정식으로 발족됐다. 입회비 1,000환 외에 월회비로 100환씩 50회에 걸쳐 도합 5,000환을 납입해야 회원자격이 부여됐다. 정회원에게는 “사망 후 7일 이내에 연미사를 올린다” 등 회칙에 규정된 혜택을 받게 되었다. 통상 1,000명 내외의 회원을 확보한 연령회는 울대리 묘지 구입에 기여한 공이 자못 크다.

박일규 안드레아 신부(길음동 성당 5대)는 은퇴 후 교구에서 지급하는 생활비를 하는 일도 없이 받는 것이 죄송했다. 박신부는 생활비을 절약하고 저축했다가 딱한 처지에 놓인 교우나 이웃이 있으면 남몰래 애긍하곤 했다.

 
6.25사변 후 성당도 점차 안정을 되찾고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게 됨
1956년 09월
초대 김서운(사베리오) 수녀(성가소비녀회 소속) 부임 이후 10년간 전교
12월
5대 박일규(안드레아) 신부 이임, 6대 임세빈(요셉) 신부 부임
1957년 03월
첫 번째 쁘레시디움 샛별Pr. 창단 (서울에서 4번째)
06월
성전 기공
1958년 06월
성전 준공 및 축성 (연면적 176평 석조, 연면적 30평 사제관 축성, 노기남 대주교 집전)
1961년 06월
본당 연령회 발족
1962년 04월
본당 대지 추가구입 (정릉동 10-155 49평, 10-156 38평)
08월
본당 주보(週報) 창간 (1978.5.14 제820호를 끝으로 교구주보로 흡수)
1964년 04월
본당 묘지 구입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울대리 일대, 4만평)
1966년 01월
5대 박일규(안드레아) 신부 은퇴
11월
본당 수녀원 개원, 수녀 3명 사목 협조